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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

구조주의와 포스트구조주의-12

by Ang ga 2024. 6. 6.

상징계에 대해 논의하기에 앞서, 라캉의 이론이 '주체, 개체'의 철학이나 '관계, 짝'의 철학과는 다르다는 점을 명확히 할 필요가 있습니다. 라캉은 상상적 구조가 '주인'과 '노예' 사이의 소외적 변증법을 도입할 조건을 나타낸다고 봅니다. 상상계의 틈새를 직시하지 않으면, 현실 속 존재들 간의 관계가 가역적으로 생길 수 있다고 착각하게 됩니다. 이는 동물의 세계에서나 가능한 것이며, 인간의 진실을 파악하는 데는 실패합니다.

 

라캉은 상상적 '봄-보임' 관계가 무시나 오인으로 귀착된다고 지적합니다. 메를로퐁티는 '봄-보임' 관계가 상호성을 통해 진정한 인식에 도달하는 것으로 이해하지만, 이는 인간 본성에 대한 신앙에 뿌리를 둡니다. 그러나 정신분석학에서는 인간 본성을 착란된 자연으로 봅니다. 융은 정신분석학에 우로보노스적 환상을 가져왔으며, 라캉의 상징계와는 관련이 없습니다. 융의 상징은 상상계의 요소로, 종교적으로 미화된 생명적 게슈탈트에 불과합니다. 융이 프로이트의 개념을 스위스풍으로 중성화한 반면, 라캉은 프로이트의 분열 개념을 철저히 추구했습니다.

 

3-4. 구조와 그 바깥

 

라캉의 상징계는 언어적 질서로서의 구조를 갖추고 있으며, 이는 게슈탈트 이론과는 완전히 다른 개념입니다. 라캉이 말하는 구조는 생명을 초월하는 여백, 즉 삶의 연속이 아닌 죽음의 불연속에 의해 분절화된 것입니다. 이는 소쉬르가 언어에 대해 발견하고, 레비스트로스가 사회에 대해 일반화한 구조와 유사합니다. 그러나 라캉은 구조주의자가 아니며, 구조의 생성 과정과 구조와 아직 구조에 포섭되지 않은 것 간의 역동적인 상호작용을 분석하려 합니다.

 

라캉에게 구조는 평면적으로 닫히지 않으며, 부재하거나 초월적인 위치에 있는 중심에 의해 지탱됩니다. 이 중심의 추출은 변증법적 과정으로 인해 필연적으로 발생하는 살해와 금지의 드라마를 배경으로 합니다. 이는 구조주의의 틀을 넘어서는 인식입니다. 레비스트로스는 근친상간의 금지를 자연과 문화의 갈림길로 보았으나, 이를 외족혼의 규칙과 동일시하여 문화 내의 여자의 교환 분석에 집중합니다. 반면, 라캉은 살해와 금지의 드라마를 폭력적인 도약으로 인식하며, 추출된 중심에 전원이 일방적으로 자신을 맡기게 함으로써 상징적 부채를 형성합니다.

 

레비스트로스의 '떠다니는 기표' 의 이론은 그의 의도와는 달리 구조가 평면적으로 닫힐 수 없음을 시사한다고 라캉은 주장합니다. 라캉은 모스의 일반적 교환 이론을 통해 증여물의 순환이 자연적으로 이루어지지 않음을 지적하며, 이 순환의 원동력을 증여물에 잠재된 특수한 힘-하우로 설명했습니다. 이 특수한 요소(떠다니는 기표, 하우, 주술)가 상징적 질서에서 과잉을 집약적으로 떠맡습니다.

 

상징적 사고는 자의성의 카오스를 변별적으로 분절된 두 계열의 평면적인 확대로 질서화하려 하지만, 기호의 평면은 과잉을 다 회수하지 못하고 특정 위치에 주름으로 모아버립니다. 이러한 특수한 요소는 평면의 바깥으로 밀려나고, 전 평면에 편재되어 각 요소에 규격을 배분합니다. 각 요소가 우선 이 요소와의 관계를 통해 규정된다는 점에서, 제로-음소에 견줄 만합니다. 라캉의 이론에서 '특권적인 기표'는 남근이며, 아버지의 개입에 의한 거세를 통해 개인이 남근과의 관계에서 주체로서 재구성됩니다.

 

결론적으로, 라캉은 구조의 생성 과정과 구조와의 역동적인 상호작용을 분석하며, 구조주의의 한계를 넘어서는 인식을 제공합니다. 이는 상징계의 모순을 해결하기 위한 특별한 요소를 강조하며, 평면적 구조에서 벗어나 수직적인 운동을 발견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상징계는 언제나 그 안에 포섭되지 않은 부분과의 상호작용 속에 존재하며, 이를 내부로 계속해서 거두어들이는 역동적인 운동을 계속합니다. 이 과정은 주체가 결여를 떠맡고 있는 사실에서 출발합니다. 유아는 자신이 상실된 반쪽을 찾기 위해 절규하며, 이 절규는 기표의 쇠사슬을 통해 이름을 부여받고 의미를 갖게 됩니다. 유아가 진정으로 갈망하는 것은 완전한 알로의 회귀이지만, 이름을 부여받음으로써 좌절됩니다. 욕망은 존재 결여의 환유입니다.

 

유아가 언어의 세계에 편입되어 욕망의 주체로 자리를 잡기까지는 오랜 과정이 필요합니다. 첫 걸음은 'Fort-Da' 놀이에서 발견됩니다. 이는 엄마의 부재와 현전을 상징적으로 조작하여 자신의 욕망을 통제하려는 시도입니다. 이 과정(결여를 능동적으로 떠맡아 통제하려는 노력)은 유아가 상징계로 들어가는 계기가 됩니다. 

 

상징계의 바깥은 상징계의 한계이자 조건으로, 상징계는 결여를 바탕으로 하며, 그 결여가 만족되지 않는 상태로 주체의 욕망을 계속 빨아들입니다. 상징계는 결여의 십자가를 짊어지고 있으며, 이는 상징계의 역동적인 구조를 형성합니다. 라캉의 무의식 개념은 주체의 욕망과 '대타자'를 연결하는 담론의 운동으로 이해해야 합니다. ("무의식은 언어와 마찬가지로 구조화되어 있다.")

 

3-5. 구조와 힘

 

라캉은 구조주의의 극한에 서 있지만, 그 한계로 인해 힘을 사후적으로만 발견할 수 있습니다. 주체가 '대주체'와의 동일화를 통해 구성된다는 논리에 따르면, 주체가 되기 이전의 개인의 존재는 모순적입니다. 이는 개인들의 상호관계적 평면에서 논의가 시작되면 '대타자'의 권력과 질서가 필연적으로 요청된다는 점에서 나타납니다.

 

『안티오이디푸스』에서 문화는 수직적 힘의 드라마로 받아들여집니다. 이는 착란된 자연을 바로잡으려는 힘과 이에 반발하는 힘의 갈등으로, 이 운동이 사회의 표면에 확대되어 구조를 형성합니다. 들뢰즈와 가타리는 이 구조를 (1) 원시 공동체/코드화, (2) 고대 전제국가/초코드화, (3) 근대 자본제/제한된 탈코드화로 나눕니다. 라캉적 구도는 (2)에만 해당하며, 문제틀의 변혁이 상대화를 가능하게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