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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

구조주의와 포스트구조주의-10

by Ang ga 2024. 6. 3.

구조를 분석할 때 사람들은 정적인 총체를 구성하는 긴밀한 차이의 그물을 발견합니다. 반면, 데리다는 글쓰기라는 다층적인 직물에서 차이의 유희를 발견합니다. 이는 단순한 시간적인 지연이 아닌, 공시와 통시의 대립에 앞서는 원운동의 장입니다. 차이의 총체는 닫힌 울타리를 형성하며, 그 바깥과 이원론적 대립관계를 가집니다. 그러나 차이가 전개되는 장은 이러한 이원론적 구도로는 파악할 수 없습니다. 구조와 그 바깥을 발견하더라도, 양자는 분리와 상호침투라는 결정 불가능한 흔들림을 내포한 이망적인 연관을 통해 파악해야 합니다. 이원론적인 변증법의 논리는 이망의 그래픽으로 비켜가게 됩니다. 이러한 생각의 단초는 말라르메와 니체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데리다의 글쓰기 접근법은 바르트와 유사합니다. 바르트는 텍스트를 끊임없이 풀어 헤치는 거미의 보금자리로 파악했습니다. 이는 단단한 이원론적 도식으로는 수습되지 않는 착종된 운동체입니다. 이러한 운동체를 파악하려면, 경직된 도식에 얽매인 과학이 아닌, 니체가 말하는 즐거운 과학이 필요합니다. 바르트는 이를 '텍스트의 쾌락'이라 불렀습니다.

 

초기의 크리스테바는 바르트의 텍스트 개념을 탐구했으며, 이후 국가박사논문에서 상징계/기호계의 이원론을 내놓았습니다. 이는 큰 이론적 진전처럼 보였지만, 동시에 중요한 이론적 후퇴이기도 했습니다. 이원론을 전제한 상태에서 시적 언어를 설명할 때, 이는 고도로 추상적인 설명에 머물 수밖에 없습니다. 예를 들어 시를 구체적으로 읽는 과정을 통해 데리다의 '글쓰기'나 바르트의 '텍스트'가 시를 설명하는 데 유효한 개념일 수 있습니다.

 

이 장에서 제시한 구도는 불충분합니다. 그러나 바타이유의 이론을 넘어서기 위한 단초를 마련했다면, 이 장의 목적은 달성된 것입니다. 여전히 들뢰즈와 데리다 사이의 거리를 정밀히 측정하는 작업과 구체적인 기계나 장치들에 대한 분석이 필요합니다. 이를 통해 바타이유를 고쳐 읽고, 헤겔과 니체 사이에서 바타이유의 미묘한 위상을 정밀하게 측정할 수 있습니다. 이는 결국 바타이유의 '가능성의 중심'을 탐사하는 것과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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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부 구조주의의 한계를 넘어 -라캉과 라캉 이후

 

3. 라캉 구조주의의 한계

 

3-1. 개체와 마주서다

 

근대 사상에서 주체의 구성 작용을 기초로 타자의 문제와 상호주관성의 문제가 아포리아로 대두하는 것은 필연적입니다. 『존재와 무』의 사르트르는 주체와 타자가 '나냐 너냐'의 끝없는 투쟁 속에 갇혀 있으며, 이러한 갈등은 영원히 해결될 수 없다고 보았습니다.

 

이를 극복하는 한 가지 방법은 주체와 타자가 서로 '상대방의 몸이 되어 보는' 것입니다. 주체는 자기 관점에서 세계를 구성하지만, 타자 또한 다른 관점의 중심이라는 것을 깨달을 때 관점들의 상호 교환이 가능합니다. 이렇게 성립하는 상호주관적인 세계가 언어적으로 구조화되어 공동주관적인 세계를 형성합니다. 예를 들어, '여기에 있는 나'가 타자에게는 '저기에 있는 그'가 되는 가능성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이 경우 주체는 사회적 존재가 됩니다.

 

피아제는 유아의 발달 과정을 통해 이러한 과정을 통시적으로 진행된다고 보았습니다. 유아는 처음에는 자기중심적인 존재이지만, 성장하며 탈중심화를 통해 관점을 상대화할 수 있게 되어 사회생활에 필요한 상호성을 배웁니다. 반면, 와롱은 출발점을 자타 미분의 혼돈에 두고, 그로부터 주체가 형성되는 과정을 추적했습니다. 이를 철학적으로 심화시킨 것이 메를로퐁티입니다.

 

메를로퐁티는 자타 미분의 공생 상태를 근원적 탈자태라 부르며, 이는 전인칭적인 삶의 바다입니다. 성장에 따라 개개의 주체들이 드러나지만, 삶의 바다는 여전히 개개 주체의 심층에 가로놓여 있습니다. 이로 인해 주체끼리의 만남에서 관점 교환이 가능합니다. 메를로퐁티는 이를 신체적 수준에서의 조작으로 간주하며, 이는 상호신체성의 영역을 구성합니다.

 

메를로퐁티는 조화로운 측면만을 강조하지 않았습니다. 초기 단계에서의 유아와 타자의 관계는 대립적 양가성을 특징으로 하며, 상호 소외의 모순이 존재합니다. 이러한 문제들이 극복되는 메커니즘은 명백하지 않지만, 메를로퐁티는 상호주관성의 기반으로 전인칭적인 삶의 영역을 강조했습니다. 사르트르의 철학이 개체의 철학이라면, 메를로퐁티의 철학은 마주섬의 철학, 조화로운 상호성과 그 평면적 전개의 철학입니다. 이는 라캉의 이론과는 거리가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