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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

구조주의와 포스트구조주의-9

by Ang ga 2024. 6. 2.

2. 디아그람

 

2-1. 구조

 

칸트는 인간 주관에 아프리오리하게 구비된 형식에 의해 대상이 구성되며, 그러한 구성에 앞서는 '물자체'에 대해서는 말할 수 없다고 주장했습니다. 이는 현상계와 물자체, 투명한 표상 체계와 그 바깥의 '어둠'이라는 이원론을 형성합니다. 쇼펜하우어는 이를 '표상으로서의 세계'와 '의지로서의 세계'로 해석했습니다.

 

이 이원론은 형상/질료, 관념/물질의 이원론에서 유래하며, 관념론과 유물론의 대립을 초래합니다. 칸트는 물자체의 존재를 부정하지 않고 말할 수 없는 영역으로 추방했지만, 물자체를 무로 말소할 때 전형적인 관념론이 성립합니다.

 

칸트는 상징 체계를 구성하는 것이 모든 인간이 아프리오리하게 공유하는 보편적인 형식이라고 보았습니다. 그러나 구조주의는 이 형식이 상호주관적이며, 각 문화에 고유한 구조를 이루는 것으로 간주합니다. 따라서 표상 체계는 아프리오리한 필연성이 아니라 자의성 위에 구축되며, 차이의 공시적 체계로서의 상징적 질서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구조주의의 입장에서는 표상 체계의 구조만을 문제삼고 그 바깥을 무시하거나, 형상에 의해 규정된 질료로만 고려하는 방식밖에 없습니다. 이러한 입장에서 벗어나 참된 의미의 유물론의 가능성을 탐구하려면 이 이원론을 넘어설 필요가 있습니다. 이원론의 극복은 필연적으로 변증법, 즉 구조와 그 바깥의 변증법으로 이어집니다.

 

2-2. 구조와 그 바깥변증법적 상호작용

 

헤겔은 칸트의 정적인 표상 체계와 물자체의 구도를 부정하고, 양자를 포함하는 역동적인 변증법적 과정을 강조합니다. 헤겔의 체계는 절대적 관념론에 기초하지만, 이를 전도하여 절대적 보증인 '정신'을 배제하면, 구조와 그 바깥의 이질성이 끊임없는 긴장과 변동의 관계로 나타납니다. 구조는 바깥과의 상호작용을 통해 변형되고 새로운 잉여가 생성되어 배제되며, 이 과정은 기원도 종국도 없는 무한한 과정으로 나타납니다.

 

바타이유는 헤겔의 절대적 보증을 제거하고, 유보 없는 소진과 절대적인 상실 속에서 진정한 '지고함'을 추구합니다. 바타이유의 변증법적 과정은 종합을 결여한 무한한 반복 운동으로, 일상과 축제의 주기적 경련을 통해 사회적 변동을 경험합니다.

 

크리스테바는 구조를 상징적 질서로, 그 바깥을 기호론적 부정성으로 파악하여, 양자의 변증법적 상호작용을 통해 상징적 질서의 재구성을 설명합니다. 상징적 질서는 기호론적 부정성을 배제하며 구성되고, 기호론적 부정성은 침범을 통해 상징적 질서 속에서 분출하여 재구성됩니다.

 

이러한 이해는 정적인 이원론을 역동화하고, 무시되던 질료적 측면을 과정에 포함시킵니다. 그러나 이는 여전히 구조에서 남는 잔여에 불과하며, 이원론의 진정한 극복이라기보다는 변증법적 과정을 통해 침범의 순간을 물신화하는 위험을 내포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변증법화가 아닌, 형상/질료 또는 관념/물질의 이원론을 단적으로 뛰어넘는 지점으로 이동해야 합니다.

 

2-3. 기계·장치· 텍스트

 

들뢰즈와 가타리는 힘의 뒤엉킴과 기계의 운동을 통해 구조와 그 바깥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기계들이 연결과 단절을 반복하면서 작동하는 것은 단순한 은유가 아니라 실제 현상을 나타냅니다. 만약 기계들의 스냅 사진을 찍어보면, 정적인 설계도가 나올 것입니다. 조금 시간이 지나 다시 사진을 찍어 보면 약간의 차이가 나타날 것입니다. 이 차이는 구조의 외부에 남아 있는 무형의 질료(물질에너지)로 설명될 수 있습니다. 이처럼 들뢰즈/가타리적 기계는 구조와 그 바깥으로 추상되며, 이는 정적인 형상과 벌거벗은 물질에너지라는 질료로 추상됩니다.

 

여기서는 운동을 추상적 이원론에 앞서는 원질료로 보고, 구조를 운동이 그때마다 그려내는 이차적인 패턴으로 상대화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이것은 하나의 추상으로부터 더한 추상으로 거슬러 올라가는 것이 아니라, 현실을 그 구체성에서 받아들이는 방법입니다. 힘들의 뒤엉킴과 기계들의 운동이라는 개념을 통해 현실을 이해하고, 이를 추상함으로써 구조와 그 바깥, 형상과 질료의 이원론이 생깁니다. 중요한 것은 이러한 추상을 폐기하고 현실의 움직임을 있는 그대로 직시하는 것입니다. 

 

기계들의 움직임은 사회적 현실 속에서 쉽게 발견될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공장을 생각해 보면, 신고전주의 경제학은 공장을 인간의 노동을 포함한 여러 생산 요소들의 집합으로 봅니다. 다른 한편으로는, 이러한 환원에서 누락된 측면을 강조하기 위해, 기술적 지식을 포함하지만 그것으로만 환원될 수 없는 하나의 상징 체계를 공유함으로써 공장의 통일이 유지된다고 말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현실의 공장을 보면, 사람들은 상징적 윤리나 기술적 지식보다 신체적인 숙련의 차원에서 제휴하고, 다른 요소들의 체계와 연계해서 움직입니다. 이때 공장이나 그곳에서 일하는 사람들은 모두 기계들의 운동으로 간주될 수 있습니다.

 

이러한 견해는 다른 사회 조직, 특히 국가에도 적용될 수 있습니다. 알튀세르의 국가장치론을 이러한 맥락에서 다시 읽는 것도 가능합니다. 푸코의 권력장치 분석은 이러한 방향에서 큰 진전을 이뤘으며, 이는 니체의 『도덕의 계보학』의 연장선상에서 쓰였다는 사실도 중요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