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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

도덕의 계보-니체-16(제3논문)

by Ang ga 2025. 5. 3.

26. ‘객관성’이라는 이름의 위선: 역사학의 금욕주의와 허무주의

 

현대 역사 기술은 ‘거울’이 되기를 원한다

  • 근대 역사학은 판단을 피하고 단지 사실을 묘사하는 거울이 되려 한다.
  • 목적론도 배제하고, ‘증명’하지도 않으며,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는 태도를 유지한다.
  • 이것은 겉으로는 냉철하고 중립적인 태도지만, 니체는 이를 금욕주의적이며 동시에 허무주의적인 시선으로 본다.

 

삶의 온기가 사라진 ‘북극적 시선’

  • 이런 역사 기술은 삶에 대한 무관심, 내면 회피, 자기 망각의 산물이다.
  • 탐험가처럼 바깥만 응시하며 안을 보지 않으려 하고, “무엇을 위한가?”, “무다!” 같은 회의와 허무만 남긴다.
  • 생명이 사라진 이 눈 덮인 풍경 속에는 톨스토이식 동정이나 냉소적 정치론만이 남는다.

 

달콤한 ‘정관성’조차 금욕주의의 변종이다

  • 삶이나 이상 모두에 애매하게 추파를 던지는 ‘음탕한 관조자’형 역사학자들은 오히려 더 혐오스럽다.
  • 이들은 “예술”을 빌려 모든 것을 감상으로 포장하지만, 실상은 냉소와 허영, 지적 사기극이다.
  • 니체는 이를 두고 ‘정관적’이고 ‘향락주의적인 역사향수병자’라고 비판한다.

 

‘관객’을 향한 분노: 르낭과 같은 위선자들

  • 니체는 역사를 구경거리로 만드는 르낭 같은 인물들에게 분노한다.
  • 르낭은 반쯤은 성직자, 반쯤은 호색가로, 허세와 위선을 예술로 포장하는 대표적 인물이다.
  • 이런 위선자들은 이상이라는 두건을 쓰고 빈껍데기 영웅 놀이를 한다.

 

유럽 정신의 황폐화와 자극 중독

  • 현대 유럽은 흥분제와 자극의 과잉 상태이며, 바그너의 음악, 정치, 맥주, 신문 등이 정신적 독주로 작용한다.
  • “고민의 종교”, “고귀한 분노”, “정신적 평발을 위한 의족” 등은 위조된 이상주의의 상품화된 모습이다.
  • 니체는 이것을 ‘이상주의 장사’로 부르며, 유럽 공기를 정화할 손길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진실한 이상과 위선적 이상을 구별하라

  • 니체는 금욕주의적 이상에 대해 정직하고 일관된 경우에는 경의를 표한다.
  • 그러나 그것을 가장한 모조 이상주의자들, 아양 떠는 빈대들은 단호히 거부한다.
  • 그들은 도덕적 자세를 남용하여 대중을 유혹하고, 이상을 오염시킨다.

27. 금욕주의적 이상은 '진리를 향한 의지'로 자멸한다

 

무신론조차 금욕주의의 '최종 귀결'일 뿐이다

  • 진리를 향한 의지는 금욕주의적 이상이 형식만 바꿔 살아남은 신비한 잔존물이다.
  • 무신론은 이상을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그 이상이 가장 철저하게 논리적 완결에 도달한 결과일 뿐이다.
  • 즉, 절대적으로 성실한 무신론은 이상에 대한 반대가 아니라 마지막 발전 단계다.

 

기독교는 자기 도덕에 의해 몰락했다

  • 그리스도교의 진리 추구는 지적 양심으로 정제된 성실성을 낳았고,
  • 그것은 결국 “진리를 향한 의지는 무엇을 의미하는가?”라는 근본적 질문을 던지게 했다.
  • 이 질문은 기독교 도덕 자체가 자기를 부정하게 만든다는 결론으로 귀결된다.

 

'위대한 몰락'은 내부의 법칙에서 시작된다

  • 모든 위대한 사물은 자기 초극의 법칙, 스스로 정한 법에 의해 자기 자신을 무너뜨린다.
  • 기독교의 도덕성은 자기 진실성에 의해 신앙의 기반을 스스로 해체했다.
  • 우리는 지금 도덕으로서의 기독교의 몰락이 시작되는 현장에 서 있다.

 

다가올 두 세기: 도덕 몰락의 연극이 펼쳐진다

  • 진리를 향한 의지가 스스로를 문제로 자각하게 될 때, 도덕은 그 기반을 상실하게 된다.
  • 이것은 유럽 정신의 역사에서 가장 거대하고 무서운 연극의 시작이다.
  • 그러나 동시에 새로운 가능성과 희망의 시대가 열릴 수 있는 출발점이기도 하다.

28. 금욕주의적 이상은 ‘의미 없는 인간’을 구원했다

 

금욕주의적 이상은 인류에게 의미를 주었다

  • 인간은 원래 자기 존재를 설명할 능력이 없던 병든 동물이었다.
  • 괴로움 자체가 아니라, 괴로움의 의미 부재가 인간을 고통스럽게 했다.
  • 금욕주의적 이상은 처음으로 괴로움에 의미를 부여했고, 무의미에서 인간을 구원했다.

 

하나의 의미가 있다는 것만으로도 치유였다

  • “의미 없음”이라는 허무주의 앞에서, 금욕주의는 일종의 ‘구원의 해석’이었다.
  • 이는 더 깊은 괴로움을 가져왔지만, 인간을 자살적 무의미로부터 끌어냈다.
  • 죄의 원근법 속에서 고통을 해석하면서도, 인간은 하나의 의지를 가질 수 있었다.

 

그러나 그 의미는 삶의 부정이었다

  • 금욕주의적 이상은 사실상 삶에 대한 혐오, 감각적 존재에 대한 부정이었다.
  • 쾌락, 생성, 변화, 죽음 자체를 거부하며 허무를 지향했으나,
  • 그조차도 하나의 의지였다는 점에서 인간은 무(無)라도 의욕할 수 있는 존재가 되었다.

 

인간은 허무라도 ‘의욕’한다

  • 인간은 아무것도 의욕하지 않는 것보다는 차라리 허무를 의욕한다.
  • 이것이 금욕주의적 이상이 지닌 역설적인 ‘구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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